임솔아, 최선의 삶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책을 읽을 때마다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이 책이 그 첫번째 기록이 될 듯 하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트위터 때문. 인터넷보단 트위터리안들의 입소문을 더 믿는지라 트위터에서 떠들썩하게 추천을 받고 있는 이 책을 선뜻 골라 읽게 되었다.
책을 읽어나가며 혹은 다 읽고 나서 제목에 맞춰 책의 주제를 생각해보는건 대중들이 읽기 바라는 의도를 따라가는것 같아서 일부러 하지 않는 방법이긴 하지만 '최선의 삶'으로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각기 다른 최선의 삶이 가져오는 그들의 비극적인 일에 대해서도.
이 책의 주인공은 여중생인 나(강이), 아람, 소영. 셋은 주민들 간의 격차가 큰 새롭게 만들어진 읍내 전민동에서 같이 중학교를 다닌다. 이 셋도 그 격차로부터 예외일 수 없어서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고 성장하지만 아이들의 우정답게 서로를 구분지으려 하지 않는다. '서로를 구분할 줄은 알았지만 구분짓지는 않았'던 아이들은 오히려 기성세대의 그러한 구분, 자신들에게 반강제적으로 씌워진 학교라는 제도적 구속 등에 반발하여 함께 가출을 하기도 한다.
이 책의 심사평을 맡은 소설가 정한아 씨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은 그와 같은 구분에 반발하며 아무것도 묻지 않는 무인 모텔에 몰려가 알몸으로 포르노를 보고, 모두 같이 소주를 마시고 뒹굴거리며 하나의 몸, 하나의 냄새가 된다. 이들은 '다행히'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고, 무성적 존재로서의 희락을 함께 나눈다.'
하지만 애초에 집이 싫어서, 집이 '병신'이라 길을 선택한 강이와 아람과 달리 소영은 유복한 아이라 집을 나가면 '병신'같이 살아야 하는 아이. 가출의 원인과 목적이 달랐으니, 각자가 좇는 최선의 삶 역시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설은 아래에서 정한아가 말하는 대로 흘러간다.
'강이와 아람에게 그 기행이 자신을 잊어버리기 위한 것이라면, 소영에게는 자신을 찾기 위한 것이다. 그 격차는 생활의 격차보다 더 크게 그들의 사이를 벌려놓기 시작한다. (...)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아이들은 각자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 서로를 맹렬하게 증오한다. 알몸으로 하나되어 낄낄대던 아이들이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하고, 옷을 벗겨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장면은 마침내 세계의 본모습을 보고 몸을 가린 태초의 인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불합리와 모순, 그리고 분노를 느끼며 경험하는 잔인한 성장의 일면이다. 강이는 소영과의 사건을 겪으며 아이의 눈으로 본 세계에서 벗어난다'
뭐 이런 얘기쯤 된다. 한몸처럼 지냈던 소영과 내가 병신 같이 살고 싶지 않아서 서로에게 폭력을 가하는 비극적인 이야기.
임솔아 씨의 문장도 좋았다. 소설가 박성원 씨는 심사평에서 응모작 중에 기발한 소재에 기대는 소설이 많았는데 그 기발함이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유는, 아무리 기발한 이야기라고 해도 소설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문장 뿐이기 때문에 기발함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거다. 이 소설은 소재의 기발함은 없다. 하지만 문장이 좋은 소설이다.
읽으며 좋았던 문장들을 소개하고 포스팅을 마치겠다.
가장 좋아하는 장소
아무나 쓸 수 있는 샴푸 냄새와 로션 냄새를 똑같이 풍기며 같은 냄새가 되었다. 나는 친구들이었다. 전날에 묵었던 손님이었다. 옆방, 윗방, 아랫방 손님이었다. 내일 묵을 손님이었다. 아무나였다. 그날은 세상 누구나의 생일이었다.
검은 줄무늬가 있는 아기 고양이
이제는 자기가 죽을 것 같다고 엄마는 말했다. 나는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모는 사람이 되었다. 죽음에 내몰린 약자가 된 채로 엄마는 나를 엄마의 액자 속으로 밀어넣고 싶어했다.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약자였다. 샤프심보다 더 강한 약자였다. 엄마의 액자는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흉기였다. 주먹보다 더 무자비한 흉기였다. 아무도 죽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어야만 아무도 죽지 않을 거라고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세 아이
아람은 보조치아를 혀끝으로 쓸어내리며, 언젠가 보조아빠를 만들 거라고 했다.
GPS
우리는 저마다의 불행을 한자리에 모아놓고서는 어이없는 교집합을 발견하고 즐거워했다. 나는 다시 무인 모텔에 온 것처럼 행복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친절해질수록 서로에게 진절머리를 쳤다. 소영의 연기는 점점 더해갔지만, 정말로 연기를 잘하는 것은 아이들이었다.
좆밥
무릎은 꿇지 말았어야 했다. 무릎을 꿇으면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는 태도, 희망을 향해 다가가려는 태도가 나를 희망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것 같았다. 병신이 되지 않으려다 상병신이 되었다. 나는 최악의 병신을 상상했다. 그것을 바라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 유일한 출구였다.
'아람아, 너는 더러운 함정이야'
여전한 모든 것을 함정이라고 불렀다. 더럽고 교활한 함정이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소영에게 무릎을 꿇었던 그날보다 더 굴욕적인 함정들이 일상처럼 되어갔다. 익숙해지지 않기로 했다. 아이들이 나를 내버려두기로 작정했다면, 내가 내버려둘 수 없게 해야겠다고 작정하기 시작했다.
병신이 된 후에도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는 것이 진짜 병신이었다.
칼을 꺼낼 용기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다시 집을 나갈 용기도 사라졌다. 학교를 박차고 떠날 용기도, 먼 밖까지 가보고 싶다는 꿈도 사라졌다. 나에게조차 나는 투명해져갔다. 그런 나를 편안해하기 시작했다.
두 아이
투어
강이는 혼자서 살았다. 다른 물고기와 함께 있게 된다면,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온전치 못할 것이다. 상대방이 사라지거나, 자신이 사라지거나, 그것이 투어의 운명이었다. 살기 위해서 강이는 혼자서 살았다.
어항 속에서 혼자 살도록, 평생 거울과 함께 살도록,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은 아니다. 투어로 태어난 강이는 원래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했던 걸까.
스노볼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더는 세상은 아름답고 즐겁지만은 않고, 부모는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흉기를 휘두르는 존재였으며, 한몸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는 철저히 타인임을 깨달아 갈 때, 애정이 증오로 바뀌는 마음을 처음으로 겪을 때, 우리는 강이처럼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
병신이 되지 않기 위한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병신이 되지 않기 위해 강이만큼 저항할 수 있을까?
끝까지 다 읽고 나니 최선을 위해 나를 조금씩 포기하고 투명해져버린 과거의 내가 병신 중에서도 상병신이 되어있었다.
한 방 먹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