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입학시험 보기 전날 보았던 유치환론의 일부
시험을 위한 공부였음에도 좋았던 기억이 나 블로그에 일부 옮긴다.
유치환 시의 소재들은 본질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담고 있다. 이 중 사회나 도시 문명의 경우는 본질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으로 더 말할 필요가 없겠으나 그 외의 다른 것들 즉 자연이나 사물 등도 유치환에게 있어서는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 매체로 기능한다. 따라서 유치환의 시에 있어서 자연이나 사물은 그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인강네 관련해서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 근대 문학사에서 자연시를 대표하는 청록파 시인들과 비교할 때 확연히 드러나는 유치환 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청록파 조지훈의 청노루에서 초봄의 풍경을 아름답게 묘사하며 인간과 관계 없이 그 스스로 있는 자연 그 자체의 질서를 그려낸다. 유치환의 경우 오르고는 싶지만 너무 높아 오를 수 없는 괴로움의 대상으로 산을 묘사하고 있다. 시상 전개를 따라가다보면 단순한 자연으로서의 산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드러난 산, 즉 자신의 숭모하는 어떤 고결한 대상으로 전이되어 가슴에 자리한 산이다. 그 결과 산은 이제 현실의 산이 아니라 자신이 도달해야 할 어떤 이념이 되어버린다.
유치환의 모든 시가 소재를 어디에서 취하든 결국은 인생론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치환의 시는 인생에 관한 것 이외에는 별로 관심을 보여주지 않으며 시란 인생을 담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유치환이 탐구했던 인생의 의미는 사랑, 생명, 사회이다. 시적 관심이 처음에 생명과 사랑에서 출발하여 사회에까지 관심을 가지다가 만년에 이르러 다시 생명탐구에 몰두하였다.
그의 사랑시는 항상 슬프고 안타깝다.
그의 시의 주요한 테마는 생명의 영원성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생명의 영원성이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적 한계성에서 그의 시가 부딪힌 것인 바로 신과 허무라는 개념이었다. 생명의 서에서 볼 수 있듯이 생명에 대한 외경과 생명력의 충일, 그리고 그것의 영원한 지속을 동경한다. 그러나 인간은 유한적 존재로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그가 종국에 도달할 곳은 허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원이란 있을 수 없고, 영원은 즉 무라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그는 신은 실재가 아니라 이 우주를 감싸고 있는 무 그 자체로 이해한다.
신이 실재하지 않는 이 우주, 궁긍적으로는 무 혹은 허무 밖에 없는 이 세계에서 인간이 그 존재와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란 무엇일까. 여기서 다시 그의 시가 일관되게 탐구하고 있는 의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유치환에게 있어 생명의 본질이란 바로 의지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쇼펜하우어의 맹목의지나 니체의 권력의지와 유사한 개념이다. 유치환이 니체로부터 받은 영향을 고려한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유치환은 인간이 그의 생명력을 확장시키고 존재의 완전성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이 절대의 허무 혹은 영원한 무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최고로 실현시키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고조된 의지로 이 우주의 절대허무를 껴안는 일 즉 일상성을 초월하는 일이다. 생명의 서의 원시의 자태는 바로 우주의 원형적 생명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생명과 존재의 해명이라는 점에서 그가 관심을 가졌던 사랑, 사회, 생명은 결국 생명탐구의 한 양식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게 된다.
그는 의지의 시인이며 일간의 실존 방식을 끈질기게 탐구한 시인이다.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의 삶의 근원적인 것들, 예컨대 존재라든가 죽음이라든가 신이라든가 하는 문제들이었다. 대부분의 지배적인 담론은 존재의 초극에 대한 주제들이었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사색을 언어화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삶이란 근본적으로 허망하며 인간 역시 무의미하고 유한한 존재이다. 인간이란 근원적으로 유한하고 무의미하고 고독하다. 나아가가 허위와 위선의 일상성 속에 함몰해 있는 자라고도 생각한다. 신은 존재자가 아니라 우주의 어떤 내면화된 의지 혹은 힘이다. 신은 과거엔 이 세계를 창조한 실재자였으나 현재로서는 사라져 없고 지금은 다만 우주 혹은 세계를 영위하는 하나의 잠재된 의지로서만이 존재하는 자이다.
인간의 행 불행 역시 생의 의지의 자체적 표현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휴머니스트로서 인간의 문제는 결국 인간 자신에 의하여 해결될 수밖에 없으며, 인간 스스로의 의지와 책임을 강조한다. 인간이 신 그 자체가 되는 일이 그 해결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유한성을 초극하기 위해서는 허무와 대변하는 것밖에 없다. 허무는 부정적인 무가 아니라 부정을 통해서 긍정으로 나아가는 무이다. 시간의 한계 상황을 깨달아야 한다. 일상생활에 함몰하는 자는 그 영원 절대한 무를 보지 못하고 그와 더불어 소멸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시인은 일상적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무의 시간 즉 절대의 허무에 도달해야 한다. 필멸의 날이 있는 까닭에 세속적 삶의 쾌락에서 깨어나 이로부터 초월해야 할 것임을 역설한다. 일상적 무가 아닌 완전한 무를 껴안을 때 비로소 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희노애락의 본능적 감정은 이성의 명징성을 흐리게 하고 생의 의지를 나약하게 하는 까닭에 적극적으로 타기해야 할 대상이다. 고독과 타협하지 않고 끝내 맞서 싸워 이겨내야 한다. 고독을 감내하는 절대 고독의 차원에 들지 않으면 안된다. 고독을 체득할 수 있는 자는 물론 통렬하게 사유하는 자이다. 절망을 회피하지 않는 자세이다.
존재는 절망을 경험해야 한다. 절망이란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인식, 세계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행위이므로 절망을 경험한 자는 세속적 일상적 공간의 그 너머에 있는 본래적인 것, 저 영원한 절대 무의 세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절망 없이 존재는 일상성의 초월을 이룰 수 없다. 신에 이르는 길은 일상성으로부터의 단절과 절대의 고독 그리고 절망 등 세 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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