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친 후 어느 날 -
나의 방안에 설움이 충만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고가는 것이 직선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맞닥뜨리는 것 같은 속에서
나의 설움은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찾아갔다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 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아 그러나 지금 이 방안에는
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느냐

흐르는 시간 속에 이를테면 푸른 옷이 걸리고 그 위에
반짝이는 별같이 흰 단추가 달려있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자꾸 뻐근하여만 가는 목을 돌려
시간과 함께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것
그것은 혹시 한자루의 부채
- 그러나 그것은 보일락 말락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것 -
하나의 가냘픈 물체에 도저히 고정될 수 없는
나의 눈이며 나의 정신이며

이 밤이 기다리는 고요한 사상마저
나는 초연히 이것을 시간 위에 얹고
어려운 몇고비를 넘어가는 기술을 알고 있나니
누구의 생활도 아닌 이것은 확실한 나의 생활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
빈 방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 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는가




- 김수영, 『방안에 익어가는 설움』, 1954.


​설움이 가득한 생활이어도 이건 누구의 생활도 아닌 이것은 확실한 나의 생활
설움이 방 안에 충만할 때도, 우둔한 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설움을 역류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헤맬 때도, 고요한 사상을 시간 위에 얹고 어려운 몇고비를 넘어가는 것

그렇고 설움을 보낸 뒤 빈 방에 홀로이 머물러앉아 책을 열어보는 것

'글쟁이의 서재 > 시인의 책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나라의 장난  (0) 2016.01.27
심보선 청춘  (0) 2015.12.03
황인찬 종로사가  (0) 2015.12.02
복효근 순간의 꽃  (0) 2015.12.02
너라는 악보  (0) 2015.10.1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