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많은 생각들과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느껴지는

수많은 느낌들, 감정들..을 느끼게 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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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일부일처제, 낭만. 분수는 높이 솟구친다. 힘차게 흩어지는 물은 거품까지 일으킨다. 충동의 출구는 단 하나밖에 없다. 나의 사랑, 나의 아기뿐이다. 이 전근대적인 인간들이 미치고 사악하고 비참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들의 세계는 유유자적한 태도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건전하고 덕망이 있고 행복해지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어머니라든가 연인으로 인해서, 조건반사적으로 따를 줄 모르는 여러 가지 금기로 인해서, 유혹이라든가 고독한 회한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질병과 끝없이 고립화되는 고통에다 불확실성과 빈곤으로 인해서-그들은 모진 감정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한 강한 무엇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들이 더구나 고독 속에서, 희망도 없는 개인적인 고립 속에서 모진 감정을 반추하면서 어떻게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차바퀴는 꾸준히 돌아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 회전에는 감시가 있어야 한다. 그들의 회전을 감시할 인간들이 있어야 한다. 축이 있는 바퀴처럼 견실한 인간, 건전한 인간, 순종하고 꾸준히 만족하는 인간이 있어야 한다.

울부짓는 소리-우리 아기, 우리 엄마, 나의 유일하고 유일한 사랑 따위. 신음하는 소리-내 죄, 나의 하나님, 고통의 비명, 열병에 걸려 내뱉는 중얼거림, 노령과 빈곤에 대한 한탄-그런 와중에서 어떻게 그들이 차바퀴를 회전시킬 수 있는가?

 

 

억제된 충동은 넘쳐흐른다. 범람하는 것은 감정이며 격정이다. 심지어 그것은 광증이다. 그 물살의 힘과 제방의 높이와 견고성에 좌우된다. 가로막지 않은 강물은 지정된 수로를 평온하게 흘러가서 평욘한 행복에 당도한다.

"제군들은 행복한 거야." 총통이 말했다. "제군들의 생활을 감정적으로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 여하한 수고도 아낀 적이 없었다-될 수 있는 한 어떤 감정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제군들 자신의 생활을 생각해봐. 제군은 여태까지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에 부딪쳐본 적이 있나?"

그 질문은 부정적 침묵으로 응답되었다.

"욕망의 자각과 욕망의 충족 사이에 긴 시간적 간격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적이 있었던 사람이 있는가?"

"제가 원했던 소녀가 제 것이 되기까지 거의 사 주일을 기다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강한 감정을 느꼈겠지?"

"끔찍했었습니다!"

 

- A.L. Huxley, 1894~1963, 멋진 신세계

 

충동을 억제할 필요도 없고, 욕망의 자각과 욕망의 충족 사이에 긴시간적 간격을 체험할 필요도 없고, 간혹 슬프거나 화가 나거나 외롭거나 부정적인 감정이 들더라도 몇 알의 소마로 그 모든게 해결되는 곳, 생활을 감정적으로 안락하게 하기 위하여 될 수 있는 한 어떤 감정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여하한 수고도 아끼지 않는 곳 ,바로 '멋진 신세계'

 

 

사람은 누구나 아프기 싫어하고, 상처받기 싫어한다. 아프고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것이 충족되지 못하면 큰 고통, 슬픔, 분노 등의 강한 감정을 느낀다. 이 역시 아프고 힘들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누구도 이 같은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같은 경험을 겪을 때 흔히 '아픈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을 듣거나 하게 되는데 당장 겪는 '내 일'일 때는 성숙이고 뭐고 당장은 아프지 않고 싶고, 슬프고 싶지 않다.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본 일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현실로 실현되는 곳, 말 그대로 '멋진 신세계'이다.

 

그러나 아플 일도 없고, 상처받을 일도 없으며, '만인은 만인의 공유물'이기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나를 사랑해주는 이 세계는 과연 '멋진' 곳일까? 사회적, 경제적으로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감정-아픔, 고독, 슬픔, 불행-들은 다 배제되는 것이 최선일까? 그런 감정들을 못 느끼게 하는게 행복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아프기 싫어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면 대신 아파하고 싶어하는 등 아픔을 감수하고자 하기도 하며(이것에서 행복이나 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상처받는 것이 아픔임을 알면서도 그것보단 행복이 더 크기에 상처받는 것을 택하기도 하며, 어리석은 짝사랑을 슬퍼하는 한편 행복함도 느끼기에 멈추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비록 고통과 함께 하는 행복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이 명백히 행복임을 증명한다.

또한 우리는 부정적 감정으로 인해 행복이 절대 가져다 줄 수 없는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프지 않음에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부정적 감정을 겪어봐야만 그 감정을 긍적적인 감정이나 방향으로 승화시켜 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고통이나 불확실성, 빈곤으로 인해, 모진 감정들로 인해, 더 이를 악물고 나아갈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아갈 수 있으며, 발전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사회적, 경제적으로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감정을 버리지 않았기에 결국 사회적, 경제적으로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사회를 이루는 힘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인위적인 행복이기에, 거짓되고 기만적인 행복함만을 느끼며 안락하게 살 수 있는 멋진 신세계를 거부한다.

인간의 감정은 희노애락애오욕이 함께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느껴지는 것들을 가감없이 온전히 느껴야하고 힘들면 힘들어하고 슬프면 슬퍼해야 한다. 그래야만 건강한 사회에서 건강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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