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작가인 황정은 작가를 통해 알게 된 프리모 레비

황정은 작가만큼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좋아한다는 작가는 대체 어떤 글을 쓰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프리모 레비의 책을 읽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의 저서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끌렸던 건 바로 이 표지가 실려있는 <이것이 인간인가>

그림을 보는 순간에 이 책은 날 참 불편하게 하겠구나, 불편하게 하겠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속성에 대해서 많은 걸 가르쳐 줄 수 있겠구나 라는 예감이 들었고 그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먼저 작가에 대해 간략히 말하자면,

프리모 레비는 유대계 이탈리아 화학자이자 작가이다. 24살부터 당대 횡행했던 파시즘에 저항하는 운동을 하다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평균 생존기간이 3개월이라는 그 곳에서, 그는 화학자라는 이유로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고,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패하게 되면서 그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돌아온 후 그는 자신의 경험과 사유를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하였다. 그의 책들이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고 큰 조명을 받아 캄피엘로상과 비아레조문학상 등 여러 상들을 수상하기도 했으나 1987년 자살로 생을 마쳤다.

그의 저서로는 이 책을 비롯하여 <주기율표>, <지금이 아니면 언제>, <휴전>, <멍키스패너>,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가 있는데 모두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참 많이 좌절했고 참 많이 분노했으며 참 많이 참담했다.

그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냉정한 회고가, 그 증언들이 내것같은 아픔을 주었다.

<책 속의 문장>

목차와 함께 소개해보겠다. 이 책은 시간에 따라 서술되고 있으며,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기차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1.여행

카르피 역


거기서 우리는 최초의 구타를 당했다. 너무나 생소하고 망연자실한 일어어서, 몸도 마음도 아무런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무척 심오한 경이로움만을 느꼈을 뿐이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도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

 
객차 안에서는 남녀노소가 싸구려 상품들처럼 무자비하게 포개진 채 무를 향한, 아래쪽을 향한, 바닥을 향한 여행을 했다.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벽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과 정반대되는 측면을 깊게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즉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 양 극단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인생의 순간들은 서로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영원불멸의 것들과 대립하는 우리의 인간적 조건에 기인한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늘 모자란 인식도 그 중 하나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희망이라 불리고 어떤 때에는 불확실한 내일이라 불린다.모든 기쁨과 고통에 한계를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도 그중 하나다. 어쩔 수 없는 물질적 근심들도.

이것들이 지속적인 모든 행복을 오염시키듯, 이것들은 또 우리를 압도하는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그만큼 삶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여행 중에 그리고 그후로도, 끝도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건져낸 것은 바로 이런 불편함, 구타, 추위, 갈증이었다. 살려는 의지나 의식적인 체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고, 우리는 평범한 인류의 표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객차에 탔던 45명 중 다시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4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객차가 가장 운이 좋은 경우였다.




2. 바닥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행해야 할 의식은 끝도 없고 무의미했다. 일은 그 자체로서 법과 금기와 여러 가지 문제들이 복잡하게 뒤얽힌 고르디오스의 매듭이었다. 우리의 삶은 그와 같을 것이다. 매일, 정해진 리듬에 따라 나가다 들어가다, 나갔다가 들어올 것이다. 일하고 자고 먹고, 아팠다가 낫거나 죽을 것이다. ......언제까지? 이런 질문을 하면 고참들은 웃는다. 그들에게 미래의 문제는 몇달전부터, 몇년전부터 빛을 잃었다. 눈앞의 급박하고 구체적인 문제 앞에서 먼 미래의 중요성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눈이 오지 않을까, 부려놔야 할 석탄이 있을까, 오늘은 얼마나 먹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들 앞에서.



우리가 이성적이었다면 명백한 증거들 앞에 체념했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운명은 전혀 알 수 없으며 모든 추측은 자의적일 뿐 아니라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했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 사람들은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다. 성격에 따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고 여기서는 살 수 없으며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금방 확신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를 기다리는 삶이 힘겹기는 하지만 구원의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멀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믿음과 힘이 있다면 우리 집으로 다시 돌아가 사랑한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인 이 두 부류가 그렇게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불가지론자들이 많아서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화 상대와 상황에 따라, 기억도 일관성도 없이 두 극단적인 입장 사이에서 동요하기 때문이다.



수용소에 들어온 지 보름 뒤에 나는 이미 규칙적으로 배가 고팠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알지 못하는, 밤이면 꿈을 꾸도록 만드는, 우리 몸 구석구석에 자리잡은 만성적인 허기다. 내 육체는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빵, 그 성스럽고 거무스레한 조각 말이다. 옆 사람의 손에 들린 것은 너무나 크게 보이고, 내 손에 들린 것은 눈물이 날 만큼 작다.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하사관이었던 슈타인라우프의 말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3. 카베

주위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적대적이다.

말할 때, 바라볼 때, 완전히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마치 늪 가장자리에 길게 늘어선 돌멩이들에 달라붙어 있다가 바람에 흔들리는 곤충의 허물 같다. 그는 모든 일에 심드렁해서 힘든 일이나 구타를 피하려고도, 음식을 구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짐수레를 끄는 말만큼의 영리함도 없다. 말도 완전히 탈진하기 조금 전에 걸음을 멈춘다. 하지만 그는 기운이 완전히 바닥날 때까지 수레를 밀고 끌고 옮긴다. 그러고는 예고의 말 한마디 없이, 슬프고 우울한 눈을 땅에서 떼지도 않은 채 갑자기 쓰러져버린다.

아프기보다는 아연케 하는 구타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했다.


그들의 영혼은 죽어 있다. 음악은 바람이 낙엽을 날리듯 그들을 떠밀며 그들에게서 의지를 몰아낸다. 의지 같은 것은 이제 없다. 북소리의 박자가 걸음이 되고, 반사작용으로 지친 근육을 잡아당긴다.

이렇게 신중하면서도 침착하게, 눈에 띄지도 않게, 분노도 없이 매일 카베의 막사에서 학살이 자행된다. 그러나 이것은 카베의 삶이 아니다. 선발이라는 결정적인 순간도, 설사와 이를 검사하는 기괴한 일화도, 질병조차도 카베의 삶이 아니다. 카베는 육체적으로 가장 편한 수용소다. 그래서 아직 의식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기서 의식이 다시 깨어난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울타리인 카베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이 아주 연약한 것이며 이 인간성이야말로 우리 생명보다 더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픈 인류로 미어터질 듯한 막사에 언어가, 추억이, 다른 아픔이 들어찬다. 다른 아픔이란 독일어로 '하임베' heimweh(향수병)라는 것이다. '집을 향한 아픔'이라는 뜻의 아름다운 단어다.



4. 우리의 밤


명백히 절망적인 상황에서조차 숨을 구덩이를 파고, 껍질을 만들어내고, 주변에 미약하게나마 방어의 울타리를 쳐놓는 인간의 능력은 놀랍기만 하다. 이에 대해서는 깊이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대부분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카베에서 알몸으로 쫓겨난 이들은 어둡고 얼음같이 차가운 우주 공간 속에 홀로 던져진 듯한 기분이 든다.

기관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점점 더 가까워진다. 거의 나를 칠 것 같다. 그러나 기차는 결코 도착하지 않는다. 내 꿈은 아주 가볍다. 아주 얇은 베일이다. 내가 원한다면 찢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할 것이다. 그걸 찢어버리고 싶다. 그렇게 해야 내가 철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난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잠이 깬다. 완전히 깬 것은 아니고 조금 깨어나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계단에서 한 칸 더 올라간다.

아직도 따뜻한 꿈이 내 앞에 있다. 잠을 깨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꿈의 고통에 사로잡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입술을 햝으며 턱을 움직인다. 음식을 먹는 꿈을 꾸는 것이다. 이 역시 집단적인 꿈이다. 가혹한 꿈이다. 탄탈로스의 신화를 만든 사람은 틀림없이 알 것이다.

그렇게 밤새도록 자다 깨고 악몽이 교차하는 가운데, 기상 시간을 가늠하거나 그것을 두려워하느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낯선 외국어가 모든 사람들의 정신의 밑바닥으로 돌덩이처럼 떨어진다. '기상' 따뜻한 담요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경계, 잠이라는 튼튼하지 못한 갑옷, 고통스럽기도 한 밤로의 탈출, 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 우리는 다시 무자비하게 잠에서 깨어나 벌거벗고 연약한 상태에서 잔인하게 모욕에 노출된다.

5. 노동


나는 입술을 꽉 깨문다. 작은 외적 통증을 자신에게 부과하는 것이 남아있는 마지막 힘을 끌어 모으는 자극제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카포들도 그것을 안다. 몇몇 카포들은 단순히 잔인하고 폭력적이어서 우리를 구타하지만, 어떤 카포들은 사나운 말을 다루는 마부들처럼 독려의 의미로, 거의 다정하게 짐을 나르는 우리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매질을 한다.

거의 1시다. 이것은 빠르게 파괴적으로 번져가는 암세포처럼 우리의 잠을 압살하고 예정된 고통을 일깨워 우리를 짓누른다. 모든 감각들은 다가오고 있는 신호에 대한 공포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다.

6. 맑은 날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모든 힘줄 속에 뿌리박혀 있다. 이것이 인간 본질이 지닌 속성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이러한 목적에 많은 이름을 부여하며 그 성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론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문제는 훨씬 더 단순하다.

폴란드의 태양은 차갑고 하얗고 멀기만 해서 피부에 온기만 살짝 전해질 뿐이지만 마지막 안개가 사라졌을 때, 웅성거림이 창백한 우리 다수를 관통했다. 나 역시 옷을 뚫고 들어오는 온기를 느꼈을 때 인간이 왜 태양을 숭배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부나 한가운데 서 있는, 꼭대기가 거의 항상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카바이드 탑을 쌓은 건 바로 우리다. 그것을 쌓아올린 건 증오였다. 바벨탑처럼 증오와 반목이었다. 그리고 그 탑에 담긴, 우리의 주인들이 꿈꾸는 위대함을, 신과 인간, 우리 인간들에 대한 그들의 멸시를 증오한다. 오래된 신화에서처럼 오늘날 우리도, 그리고 독일인 자신들도 초월적이고 신적인 것이 아닌, 내적이고 역사적인 저주가 오만불손한 건물 위에 드리워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혼란스러운 언어에 바탕한 그 건물 위에, 불경스러운 돌로서 하늘에 도전하듯 높이 솟은 그 탑 위에.

나중에 말하겠지만, 독일인들이 4년 동안이나 사용했고 수많은 우리들이 고통스럽게 일하다 죽어나갔던 부나 공장에서는 단 1킬로그램의 합성고무도 생산되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하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우리 모두 적어도 몇시간은 배가 부를 것이므로 싸움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 기분이 좋다. 카포도 우리를 구타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어머니를, 아내를 생각한다. 보통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몇 시간 동안 우리는 자유로운 인간들 식으로 불행할 수 있다.

7. 선과 악의 차안에서


(민간인 노동자가 해프틀링과 거래를 했을 때 수용소에서 똑같은 노동과 규율을 겪는 벌을 받는데) 만약 그들과 우리의 대화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세상에 우리의 죽음을 선언하는 벽에 틈새를 낼 것이며, 우리의 상황에 대해 자유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비밀에 빛을 비춰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수용소는 벌을 받는 곳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 수용소는 게르만식 사회구조 한가운데에서 시간 제한 없이 우리에게 부과된 존재방식일 뿐이다.

8.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당시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바닥에 짓눌린 상태로 살았지만 그 기간은 상대적으로 짧았다.

나이 사회적 지위 출신 언어 문화와 습관이 전혀 다른 수천 명의 개인이 철조망 안에 갇힌다. 그곳에서 그들은 규칙적으로 되풀이되고 통제당하는, 만인에게 동등한 삶, 그 어떤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 삶에 종속된다. 이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인 인간이라는 동물의 행동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실험장이다.


여기서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한시도 쉴 수가 없다. 모두가 절망적일 정도로, 잔인할 정도로 혼자이기 때문이다.



역사와 삶 속에서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가복음 4장 25절)라는 잔인한 법칙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9. 화학 실험

사흘이 흘렀다. 보통 때처럼 별로 기억할 거리가 없는, 지나가는 동안에는 너무 길었으나 지나간 뒤에는 너무나 짧은 사흘이었다.

"조용히 기다려." 우리는 이 사실이 기뻤다. 기다리면 시간이 평온하게 흐른다. 시간을 빨리 보내기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와는 달리 일을 할 때는 매 순간이 힘들게 흘러가서 부지런히 그것을 쫓아버려야만 한다. 우리는 늘 기다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 시선은 두명의 인간 사이에 흐르는 시선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두 존재 사이에 놓인, 수족관의 유리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 같은 그 시선의 성질을 속속들이 설명할 수 있다면, 나는 제3제국의 그 거대한 광기의 본질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0. 오디세우스의 노래


그대들이 타고난 본성을 가늠하시오.

짐승으로 살고자 태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덕과 지를 따르기 위함이라오.



우리는 이곳에 오기 전 삶에 대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흐릿했고 아득했다. 그래서 몹시 달콤하고 슬펐다. 각자의 유년 시절에 대한, 이미 끝나버린 모든 일들에 대한 기억처럼. 반면 수용소에 들어오는 순간 각자 전혀 다른 일련의 기억들이 시작되었다. 이것들은 날카롭고 가까웠다. 또한 매일 상처가 덧나듯 현재의 경험에 의해 계속 상기되었다.


 노르망디와 러시아는 너무나 먼 반면 겨울은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배고픔과 절망감은 너무나 구체적이었고 그 외의 나머지 것들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진흙창인 우리의 세상과 이제는 그 끝을 상상하기도 힘든 황량하고 정체된 우리의 시간 외에 다른 세상과 시간이 존재할 것 같지 않았다.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시간의 단위들은 항상 어떤 가치를 지닌다. 그것을 통과해 살아가는 사람이 거기서 내적 자원을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가치도 더욱 커진다. 그러나 우리에게 한 시간, 하루, 한 달은, 즉 우리가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하고 싶었던 이 무가치한 잉여의 물질은 생기 없이, 그리고 항상 너무 느리게 미래로부터 과거로 내려앉았다. 하루하루 생기 있게, 소중하게,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던 시기가 끝나고 잿빛의 불투명한 미래가 우리 앞에, 마치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서 있다. 우리에게 이야기는 정지되어 있었다.

부나의 독일 민간인들은 오랜 지배의 꿈에서 깨어나 자신의 파멸을 보고 있었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확신에 찬 인간 특유의 분노를 품은 채 한없이 포악스러워졌다. 이 새로운 요소가 증오와 몰이해의 복잡한 얽힘을 아주 원초적인 수준으로 되돌려놓았고 그래서 수용소 내부의 전선은 다시 그어졌다. 정치범들은 초록색 삼각형과 SS들과 함께, 우리들 각자의 얼굴에서 보복의 비웃음과 사악한 복수의 기쁨을 보았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 점에 자기들끼리 만장일치로 동의했고 두 배로 잔혹해졌다.

공습이 끝나면 인간과 세상사의 분노에 익숙한 수많은 가축 떼처럼 아무 소리 없이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그리고 늘 하던 우리의 일을, 언제나 변함없이 증오하던 그 일을, 게다가 이제는 아무 소용도 없고 무의미한 게 분명한 그 일을 다시 시작했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SS대원들, 카포들, 정치범들, 범죄자들, 크고 작은 일을 맡은 특권층들,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노예와도 같은 해프틀링까지, 독일인들이 만든 관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11. 1994년 10월


우리는 겨울을 맞지 않으려고 온힘을 다해 싸웠다. 우리는 따뜻한 시간에 매달렸다. 해질녘이면 아직 하늘에 남아 있는 해를 조금이라도 더 잡아보려고 애썼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우리의 배고픔이 한 끼를 굶은 사람의 그것과 같지 않듯이, 우리의 추위에도 특별한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허기'라는 말을 쓴다. '피로' '공포' '고통'이라는 말도 쓴다. '겨울'이라는 말도.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것들이다. 자기 집에서 기쁨을 즐기고 고통을 아파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사용하는 자유로운 단어들이다. 만일 수용소들이 좀더 오래 존속했다면 새로운 황량한 언어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치글러가 반합을 내밀고 보통 양의 배급을 받은 뒤 가만히 기다리고 서있다. 왜 그러는 거야? 블록앨테스터가 묻는다. 치글러에게 두 배의 죽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치글러를 밀쳐 쫓아버리지만 치글러는 다시 돌아와 불쌍하게 계속 고집을 부린다. 그의 카드는 왼쪽으로 넘겨졌고 모두 그것을 보았다. 블록앨테스터가 카드를 확인하러 간다. 치글러는 두 배의 배급을 받을 권리가 있다. 배급이 정확히 주어지자 치글러는 죽을 먹으러 조용히 침대로 간다.



쿤은 자신이 선발되지 않은 것을 신께 감사하고 있다. 쿤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옆 침대의 그리스인, 스무 살 먹은 베포가 내일 모레 가스실로 가게 되었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 베포 자신이 그것을 알고 아무 말도 없이 침대에 누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작은 전등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다음 선발 때는 자기 차례가 올 것임을 모른단 말인가? 그 어떤 위로의 기도로도, 그 어떤 용서로도, 죄인들의 그 어떤 속죄로도, 간단히 말해 인간의 능력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절대 씻을 수 없는 혐오스러운 일이 오늘 벌어졌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내가 신이라면 쿤의 기도를 땅에 내동댕이쳤을 것이다.


12. 크라우스

비가 오면 우리는 울고 싶어진다. 11월이다. 벌써 열흘 전부터 비가 내린다. 속옷과 등 사이에 마른 헝겊이라도 댈 수 있다면. 삽질을 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마른 헝겊이야말로 실질적인 행복이라고 믿어버린다.

오늘 우리들의 세계는 이 진흙 구덩이다.

일을 너무 많이, 너무 힘차게 한다. 그는 아직 모든 것을, 숨쉬는 것, 움직이는 것, 심지어 생각하는 것까지 아끼는 우리의
비법을 배우지 못했다. 차라리 매를 맞는 게 더 낫다는 것을 그는 모른다. 매를 맞아 죽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고된 노역으로는 죽는 경우도 많고 병이 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았을 떄는 이미 늦다. 그는 아직 생각을 한다. 그의 행동은 이성적인 생각에 의한 게 아니다. 보잘것없는 피고용인의 어리석은 정직함 때문이다. 그는 그 정직함을 이 안까지 가지고 왔다. 지금 그는 마치 수용소 밖에 있는 것 같다. 그 세계에서는 일을 하는 것이 정직하고 논리적이며, 유리하기까지 하다.

오늘도 우리는, 아침에는 영원처럼 까마득해 보였던 하루의 분초를 통과했다. 이제 오늘 하루는 끝이 났고 곧 잊혀진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하루가 아니며 그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지 않으리라. 우리는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것을 안다.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쉬운 일도, 간단한 일도 절대 아니지만 독일인, 당신들은 그 일에 성공했다. 당신들의 눈앞에 온순한 우리가 있다. 우리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반란 행위도, 도전적인 말도, 심판의 눈길조차 없을 테니까.

(내일 퇴각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 소식은 내게 그 어떤 직접적인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몇달전부터 나는 수용소의 특징인, 한 발 물러선 객관적인 방식으로만 고통 기쁨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 방식을 '조건부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예전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감동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13. 열흘간의 이야기

그날 저녁, 그 밤 내내, 그리고 이틀 동안 그의 침묵은 헛소리에 의해 사라졌고, 헛소리는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복종과 노예 생활로 이루어진 길고 긴 꿈을 마지막으로 꾸는 듯, 숨을 내쉴 때마다 야볼이라고 중얼거렸다. 그의 앙상한 갈비뼈들이 들썩일때마다 그를 흔들어 꺠우거나, 목을 졸라버리거나, 하다못해 단어라도 바꿔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당시 나는 인간이 죽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지 못했다.

 

아래는 부록에 있는 독자에게 답한다 발췌본이다.

독자들에게 받은 질문들 중에 몇 가지를 꼽아 프리모 레비가 직접 답변한 글인데 너무 좋은 글이라 발췌..


독자에게 답한다.

1. 당신의 책에서는 독일인들에 대한 증오도 원한도 복수심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을 다 용서한 것인가?


성격상 나는 쉽게 누구를 증오하지 못한다. 나는 증오란 동물적이고 거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가능한 한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음속에 복수심 같은 원초적이 욕망이나 증오심을 키워본 적이 없고, 적이나 적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괴롭히고 사적인 앙갚음을 해본 적이 없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보기에 증오는 개인적인 것이고 한 사람에게, 어떤 이름에게, 어떤 얼굴에게 향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당시 우리를 박해했던 사람들은 이름도 얼굴도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나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을 쓸 때 의도적으로, 희생자의 한탄 섞인 어조나 복수심을 품은 사람의 날선 언어가 아닌, 침착하고 절제된 증언의 언어들을 사용하고자 했다. 나는 내 언어가 객관적일수록,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을수록 신뢰를 주고 유용하게 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할 때에만 정당한 증언이 제 기능을 할 것이며 바로 그때 심판의 장이 마련될 것이다. 심판관은 바로 여러분이다.



2. 독일인들은 알고 있었나? 연합군은 알고 있었나 수백만 명의 집단학살이 어떻게 유럽 한복판에서 아무도 모르게 진행될 수 있었나?


독재국가에서는 진실을 마음대로 바꾸고, 과거를 되돌려 역사를 다시 쓰고, 사실을 왜곡하고 삭제하고 거짓을 첨가하는 게 합법적이다.
프로파간다가 정보를 대체한다. 그런 국가에서 당신은 권리를 지닌 시민이라기보다는 신민이다. 또한 당신은 광적인 충성과 맹종을 강요하는 국가(국가를 대표하는 독재자)에 복종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현실이 대량으로 지워질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물론 공포정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거기에 저항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독일 국민은 전체적으로 저항하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는 것, 그리고 알리는 것은 나치즘에서 떨어져 나오는 방법이었다. 나는 독일 국민이 전체적으로 이런 방법에 의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3. 수용소에서 탈출한 포로들이 있었나? 집단적인 반란은 왜 일어나지 않았나?


모든 반란은 어떤 식으로든 특권을 가진, 그러니까 신체 상태나 정신 상태가 다른 일반 포로들보다 훨씬 나은 포로들에 의해 계획되고 지휘되었다. 이건 놀랄 일이 아니다. 고통을 덜 받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건 처음에는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 수용소 밖에서도 룸펜프롤레타리아가 투쟁을 선도하는 일은 드물다. '거지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4. 아우슈비츠가 해방된 뒤 다시 찾아가본 적이 있는가?


그녀는 또 작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화장터의 폐허를 가리켰다. 당신에는 굴뚝 위로 불꽃이 보였다고 했다. 그녀는 나이 많은 여자들에게 물었다. 저 불길은 뭐지요? 그러자 여자들이 대답해주었다. 저기서 타고 있는 건 바로 우리야

슬픈 추억을 되살리는 힘을 지닌 이 수용소 앞에서 살아남은 우리들은 모두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지만 대개 두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 부류는 이곳으로 돌아오기를, 혹은 이런 주제로 이야기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어서 악몽에 시달렸던 사람들도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결국 다 잊어버린 사람들, 모든 것을 지우고 제로에서부터 다시 시작한 사람들이 여기 속한다. 그들에게 고통은 사고나 질병 같은 트라우마일뿐, 의미나 가르침이 전혀 없는 경험이었다. 그들에게 기억은 낯선 어떤 것, 그들의 삶에 난입한 고통스러운 물체였다. 그들은 그 기억을 지우려고 애썼다(혹은 아직도 애쓰고 있다).

 둘째 부류는 반대로 '정치적'이었던, 혹은 어찌되었든 정치적 경험이 있거나 종교적 신념 또한 강한 도덕성을 소유한 포로들이다. 이 귀환자들에게는 기억하는 것이 의무다. 그들은 잊고 싶어하지 않는다. 특히 세상이 잊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의 경험에 의미가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떄문에, 수용소는 사고가 아니라는 걸, 단순히 예기치 못한 우발적인
역사적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파시즘은 히틀러와 무솔리니 이전에도 존재했고, 분명한 형태로 혹은 가면을 쓰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 살아남아 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수용소 체제를 향해 가게 된다. 이것은 막기 힘든 과정이다.



5. 레비는 왜 독일 수용소 이야기만 할 뿐 러시아 수용소는 언급하지 않는가?

중요한 차이는 목적성에 있다. 독일 수용소는 피로 물든 인간의 역사에서 유일한 무엇인가를 만들어냈다. 정적을 제거하거나 겁을 준다는 오래된 목적과 함께, 한 인종과 문화를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제거해버리겠다는 현대적이고도 무시무시한 목표가 자리잡고 있었다. 아우슈비츠는 1944년 8월의 단 하루 동안 2만 4000명의 포로가 사망했다는 끔찍한 초유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어린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십 만의 아이들이 가스실에서 죽어갔다. 인간의 역사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한 짓이었다.


7. 유대인에 대한 나치스의 광적인 증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부적절하게도 반유대주의라고 불리는, 유대인을 향한 적대감은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다. 즉 그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에게 품는 적대감의 한 예다. 이는 원래 동물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동물들은 같은 종이라도 다른 그룹에 속해 있는 동물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것은 가축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닭장에 있던 암탉이 다른 닭장에 들어가게 되면 그 닭은 며칠 동안 다른 닭들에게 주둥이로 쪼이며 거부당한다.
쥐와 꿀벌들의 세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사회적 동물들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리스가 말했듯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지만 이런 동물적인 불관용을 모두 용인한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의 법률이 그것을 제한하는 데 이용된다.


반유대주의는 전형적인 불관용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거부감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접촉하는 두 그룹 사이에 눈에 뜨일 정도의 차이점이 존재해야한다. 이것은 신체적인 차이(흑인과 백인, 금발과 갈색 머리)일 수도 있지만 복잡한 문화로 인해 우리는 언어나 방언, 혹은 악센트같이 미묘한 차이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북부로 이주할 수 밖에 없는 이탈리아 남부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것 중 외적으로 완전히 표현되고, 옷을 입는 방식이나 행동방식 같은 삶의 방식과 공적 사적인 습관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종교라는 것이 있다. 유대 민족의 고통스러운 역사로 인해 유대인들은 거의 어느 곳에서나 이런 차이들 중의 하나를 드러내게 되었다. 서로 충돌했던, 매우 복잡한 민족과 국가들이 뒤얽혀 있는 상황에서 유대 민족의 역사는 매우 특별해 보인다. 유대 민족은 종교적, 전통적으로 아주 강한 내적 유대관계를 유지해왔다(지금도 부분적으로는 그렇다). 그 결과 수적, 군사적으로 열세인데도 로마인들의 정복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다 패했고, 고향에서 내몰려 뿔뿔이 흩어졌지만 이들 사이의 유대는 여전히 남아 있다. 처음에는 지중해 연안에, 그뒤에는 중동, 스페인, 라인 지방, 러시아 남부, 폴란드, 보헤미아와 기타 지역에 형성되었던 유대인 거주지들은 서로 이 유대를 고집스럽게 유지했다.

 이러한 유대는 규율과 성문화된 전통, 세심하게 집대성된 종교, 일상의 모든 행동에 스며들어 있는 독특하고 화려한 의례로 만들어진 거대한 몸체 밑에서 더욱 공고해졌다. 소수인 유대인들은 그래서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 사람들과 달랐고 다르다고 인정받을 수 있었으며, 종종 자신들이 다르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그것이 옳든 그르든). 이 모든 것이
유대인들을 몹시 공격받기 쉽게 만들었다. 거의 모든 세기, 거의 모든 지역에서 가혹하게 박해를 받았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약간씩 동화되면서, 다시 말해 주변 주민들과 융화하고 좀더 호의적인 지역으로 다시 떠나기도 하면서 이런 박해를 견뎌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런식으로 자신들이 다름을 새롭게 고쳐나간 것이었고, 이 때문에 새로운 제약과 박해에 다시 노출되었다. 어쨋든 반유대주의의 본질에는 거부라는 비이성적인 현상이 자리잡고 있다. 기독교 국가에서 기독교가 국교로 굳어져가기 시작하던 때부터 반유대주의가 종교적인, 아닌 신학적인 옷을 입게 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디아스포라의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형벌을 받았다는 것이 그중 하나다. 또 하나는 유대인들이 사방에 존재하는 것이, 역시 사방에 있는 기독교 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독교 신자들이 도처에서 형벌을 받으며 불행하게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죄를 저지른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영원히 증명해야만 하고, 그 결과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증명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존재는 없어서는 안되며, 유대인들은 박해는 받아도 살해되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교회가 항상 이렇게 온건한 모습만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교회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장본인, 간단히 말해 신을 죽인 민족이라고 심각하게 비난햇고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었다. 오래 전 부활절 전례에서 등장했고 제2회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에서 겨우 폐지된 이런 공식적인 주장은 늘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치명적이고 다양한 민중 신앙의 근거가 되었다. '유대인들이 독을 풀어 페스트를 퍼뜨렸다, 습관적으로 성체에 신성모독을 가한다, 부활절에 기독교도 어린아이들을 납치해다가 아이들의 피를 발효시키지 않은 빵에 섞어 먹는다.' 이런 신앙은 수많은 피의 학살을 불러오는 핑곗거리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먼저 프랑스와 영국에서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추방을 당했고, 그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1492-1498년)

대학살과 이주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19세기에 이르렀다. 국가주의적인 의식을 일반적으로 각성하게 되고 소수자의 권리를 인정하게 된 세기였다. 차르 지배하의 러시아를 제외하고 전 유럽에서 유대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법적 제약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런 제약들은 모두 기독교 교회 때문에 가해진 것들이었다(시간과 장소에 따라 게토나 특별 구역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강제적인 의무, 표시가 된 옷을 입어야 할 의무, 특정한 일이나 직업에의 접근 금지, 유대인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의 결혼 금지 등등).

그러나 반유대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특히 저속한 종교가 그리스도 살해의 책임을 계속 유대인에게 떠넘기고 있는 나라(폴란드와 러시아), 국가적 요구 때문에 이웃 나라 사람들과 이방인들에게 일반적인 적대감을 쌓아갔던 나라(독일, 프랑스도 여기에 속한다. 19세기 말 프랑스 군대에 근무하던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간첩 행위로 고발당했을 때, 성직자들, 민족주의자들, 군인들은 격렬한 반유대주의적 감정을 퍼부었다)에서는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특히 독일에서 지난 세기에 철학자들과 정치인들이 끊임없이 광신적인 이론을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분열되어 있고 굴욕을 겪었던 독일 민족은 유럽에서, 아니 어쩌면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며, 유서 깊고 고귀한 전통과 문화의 계승자이며, 본질적으로 피와 인종 면에서 순수 혈통을 간직한 개인들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독일 민족은 거의 신적인 위엄을 부여받은, 강하고 전투적인 국가를 건설해 유럽의 지배권을 장악해야만 했다.


이런 국가적 사명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에서도 살아남았다. 뿐만 아니라 굴욕적인 베르사유 강화조약으로 더 굳건해졌다. 역사상 가장 음울하고 불길한 인물 중 한 사람인 선동적 정치가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했다. 독일 중산층과 기업가들은 그의 뜨거운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히틀러는 멋진 약속을 했다. 독일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을 경제적 파탄으로 내몬 계급에게 전쟁 패배의 책임을 묻고 그들에게 적대감을 돌려야 했으나, 히틀러는 그 적대감을 유대인들에게 향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1933년부터 시작해서 몇 년 동안 히틀러는 굴욕감을 느끼고 있는 독일인들의 분노와, 루터, 피히테, 헤겔, 바그너, 고비노, 체임벌린, 니체 같은 선각자들이 북돋아놓았던 국가적 자존심을 이용해 당을 하나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가 광적으로 집착했던 것은 먼 미래가 아니라 빠른 시일 내에 독일이 지배권을 갖는 것이었다. 문화적 사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력으로 말이다. 그가 보기에 독일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열등할 뿐만 아니라 증오의 대상이었다. 독일의 첫번째 적은 유대인들이었는데 히틀러가 독선적인 분노를 품고 밝힌 수많은 이유들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다른' 피를 가지고 있기 떄문이었다. 영국, 러시아, 미국에서 다른 유대인들과 결혼해서 서로 친척이 되기 때문이었다. 복종하기 전에 사고하고 토론하는 문화의 후계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이 문화에서는 우상에게 인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데 히틀러 자신은 우상으로 숭배받기를 갈망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는 지성과 의식을 불신하고 본능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고 주저 없이 선언했다.

마지막으로 독일계 유대인의 상당수가 경제 재정 예술 학문 문학 분야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실패한 화가이고 실패한 건축가였던 히틀러는 유대인들에게 분노와 좌절로 인한 질투심을 쏟아부었다. 이런 거부의 씨앗이 비옥한 토양에 떨어지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차게, 새로운 형태로 뿌리를 뻗어갔다. 파시스트 스타일의 반유대주의와
히틀러가 던진 말 때문에 독일 국민들에게 되살아난 그 반유대주의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보다 야만적이었다. 의도적으로 왜곡된 생물학적 이론이 덧붙여졌다. 이 이론에 따르면, 힘이 없는 인종은 강한 인종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 상식에 의해 수세기 전에 모습을 감추었던 어리석인 민중 신앙이 되살아났고, 쉴새없는 선전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극단적인 것들이었다.

유대교는 세례를 통해 멀리해야 할 종교도, 다른 것을 위해 포기해야 할 문화적 전통도 아니다. 유대인은 가장 하급 인간이며 다른 인종과 다르고 그 어떤 인종보다 열등하다. 유대인들은 겉으로만 인간일 뿐이며 사실은 인간과 다른 무엇이다. 혐오스럽고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이며, 인간과 원숭이의 거리보다 독일인들과 유대인들의 거리가 더 멀"었다.


모든 게 유대인들 탓이었다. 탐욕스러운 미국 자본주의도, 소련의 공산주의도, 1918년의 패배도, 1923년의 인플레이션도 다 유대인들 때문이었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악마 같은 유대인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나치스 국가의 단일한 결속력을 위협했다.


이론적인 설교는 실제 행동으로 신속하게, 그리고 잔인하게 이행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 불과 볓 달 뒤에 최초의 강제 수용소인 다하우 수용소가 세워졌다. 같은 해 5월에는 유대인 저자들 혹은 나치즘의 적들이 쓴 책이 처음으로 불태워졌다. 1935년에 반유대주의는 뉘른베르크 법안이라는 기념비적이고 매우 상세한 법안으로 체현되었다. 1938년에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불과 하룻밤 사이에 191개의 시나고그가 불태워졌고 수천개의 유대인 상점이 파괴되었다. 1939년 독일인에게 갓 점령된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게토에 갇혔다. 1940년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문을 열었다.


1941-1942년 대학살 장치가 완전하게 작동했다. 1944년 희생자의 수는 수백만이었다. 나치스의 선전 활동으로 널리 퍼지게 된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경멸은 수용소의 일상생활에서 현실화했다. 수용소에는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치광이 같은 상징적인 선발부대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유대인들과 집시, 슬라브 인들이 짐승이고 하찮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확인하려 했다. 아우슈비츠의 문신을 생각해보라. 소에게나 새기는 문신을 인간에게 새겨놓은 것이다. 절대 문이 열리지 않는 가축용 객차를 생각해보라.


수용소로 이송되는 포로들은(남자, 여자, 아이들 모두)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배설물 속에 몇 날 며칠을 누워 있어야 했다. 이름 대신 사용되는 수인번호, 숟가락도 주지 않아 개처럼 핥아먹어야 하는 배급, 시신을 이름도 없는 물건 취급해 금이빨을 빼내고 방직 재료로 쓰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시체 약탈, 비료로 쓰는 시신의 재, 실험용 기니피그로 전락해 약물 실험의 대상이 되엇다가 죽어간 남자와 여자들을 생각해보라.


(세심한 실험 후에) 학살을 위해 선택되었던 방식 역시 상당히 상징적이다. 배의 화물 창고와 빈대와 이가 들끓는 곳을 소독할 떄 사용하는 독가스가 사용되어야 했고 실제로 사용되었다. 이런 것들은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의 세기에 고안된 방법들이었지만 그중 어떤 것에도 수용소에서처럼 조소와 경멸이 넘쳐나지는 않았다. 알다시피 학살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전투에서 악전고투하다가 수세에 몰린 나치스들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학살을 몹시 서둘렀다. 포로들을 가스실이나 전선에 인접한 수용소로 실어나르는 기차들이 군 수송열차들을 앞섰다. 이 일은 독일이 패배했을 때에야 끝이 났지만 자살하기 몇 시간 전 구술한 정치적 유언장에 히틀러는 이렇게 썼다. "인종법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며, 전 세계 국가에 해독을 끼치는 전 세계 유대인과 끝까지 싸우라고 독일 정부와 국민에게 명한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반유대주의는 불관용의 특별한 예라고 단어할 수 있다. 반유대주의는 수 세기 동안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특징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제3제국의 독일에서 독일 국민의 국가주의적, 군국주의적 성향과 유대인 특유의 다름에 의해 반유대주의는 더욱 격화되엇다.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분노의 대상이 될 희생양이 필요했던 나치스와 파시스트의 효과적인 선전 활동 덕택에 반유대주의는 전 독일에, 그리고 유럽 대부분 지역에 쉽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은 미치광이 독재자 히틀러에 의해 발작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런 설명이 나로서는 흡족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설명은 의미가 너무 축소되었고, 적절하지 않으며, 설명되어야 할 사실과 균형도 맞지 않는다. 모호하게 시작해서 극단적인 종말을 맞기까지의 나치즘 역사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전반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광적인 분위기가 나치즘에 깔려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였다.

이런 집단적인 광기, 이런 일탈은 대개 개별적으로는 전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인들의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이런 요인들 대부분은 히틀러의 성격, 독일 국민과 그의 깊이 있는 상호작용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히틀러의 개인적 망상, 증오심, 폭력 교사가 깊은 실의에 빠져 있던 독일 국민에게 걷잡을 수 없는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이 히틀러에게 두 배로 되돌아와 그 스스로 니체가 예언했던 영웅, 독일의 구원자인 초인이 되었다는 미치광이 같은 확신을 갖게 한 것도 사실이다.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증오심의 근원에 대해 많은 글들이 발표되었다. 일반적으로 히틀러가 전 인류에 대한 증오심을 유대인에게 쏟아냈다고 말한다.  그는 유대인들에게서 자신의 결점 몇 가지를 찾아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증오하면서 스스로를 증오했다는 것이다. 그의 폭력적인 적대심은 자신의 혈관 속에 '유대인의 피'가 흐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탄생되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이런 설명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적 현상의 책임을 한 개인에게 돌려(끔찍한 명령을 실행에 옮긴 자들도 결코 무죄일 수 없다!) 설명한다는 건 옳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한 개인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행동의 동기들을 해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까지 제기된 가정들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을 변명하며 죄의 양이 아니라 질을 설명한다. 나는 솔직히 히틀러와 그의 뒤에 있던 독일의 광적인 반유대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 몇몇 진지한 역사학자들의 겸손함을 좋아한다.
이와 같은 일은 어쩌면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되어서도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정당화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내 말은 이런 뜻이다. 인간의 의도나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은(어원학적으로도)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 그 행동의 주체를 수용하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정상적인 인간 중에서 히틀러, 힘러, 괴벨스, 아이히만 등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당활스럽게 하지만 안도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들의 말(이는 안타깝게도 행동으로 옮겨졌다)이 이해 불가능하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기도 하니까.

사실, 그것들은 인간적인 말과 행동이 아니다. 역사에서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고, 생존을 위한 가장 잔인한 생물학적 투쟁과도 비교가 어려운 것이다. 전쟁을 이런 투쟁과 연결짓는 것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전쟁의 에피소드가 아니다. 전쟁의 극단적인 형태가 아니다. 전쟁은 항상 끔찍한 사건이다. 유감스러운 사건이지만 우리의 내부에 포함되어 있다. 전쟁에는 이유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나치즘의 증오 속에는 이유가 없다. 그 증오는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밖에 있다. 파시즘이라는 유해한 나무에 열린 유독한 열매지만, 파시즘 밖에 그것을 뛰어넘은 곳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 하며 경계해야만 한다. 그것을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인식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과거에 벌어졌던 일이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며 의식이 또다시 유혹을 당해 명료한 상태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까지도.



이 때문에 벌어진 일에 대해 숙고하는 건 우리 모두의 임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공개적으로 연설을 할 때 사람들이 그들을 믿었고 박수갈채를 보냈고 감탄했으며 신처럼 경배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니,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다.

자신들이 한 말의 신뢰성이나 정의로움을 앞세우지 않고 장황한 말로, 연극배우 같은 방법으로, 본능적으로 혹은 끈기 있는 훈련과 습득을 통해 암시적으로 말을 했으며 사람을 흘리는 비밀스러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같은 것들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은 대개 비정상적이거나 어리석거나 잔인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환영을 받았고 그들이 죽을 때까지 수백만의 추종자들이 그들을 따랐다. 비인간적인 명령을 부지런히 수행한 사람들을 포함한 이런  추종자들은 타고난 고문 기술자들이나 괴물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괴물들은 존재하지만 그 수는 너무 적어서 우리에게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일반적인 사람들, 아무런 의문 없이 믿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기술자들이 훨씬 더 위험하다.

아이히만이나,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이었던 회스, 트레블링카 수용소 소장이었던 슈탕글, 20년 뒤 알제리에서 학살을 자행한 프랑스 병사들, 30년 뒤 베트남에서 학살을 자행한 미군 병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성과 다른 도구로,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을 앞세워 우리를 설득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진짜 선각자와 가짜 선각자를 구별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모든 선각자를 의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들의 주장을 일단 거부하는 것이 좋다. 그것의 단순성과 눈부심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해도, 무상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고 생각되더라도, 훨씬 더 소박하고 덜 흥분되는 진실, 차근차근,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부와 토론과 추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실, 확인되고 입증될 수 있는 진실에 만족하는 게 훨씬 더 좋다.


이는 모든 경우에 적용하기엔 너무 단순한 공식임이 틀림없다. 불관용, 압제, 예속성 등을 내포하고 있는 새로운 파시즘이 이 나라 밖에서 탄생되어 살금살금, 다른 이름을 달고 이 나라 안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 혹은 내부에서 서서히 자라나 모든 방어장치들을 파괴해버릴 정도로 난폭하게 변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지혜로운 충고 따위는 아무 쓸모가 없다. 저항할 힘을 찾아야 한다. 이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유럽의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기억이 힘이 되고 교훈이 될 것이다.



8. 수용소 포로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당시를 떠올리면 어떤 기분인지? 어떤 요인들 덕에 생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지?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미래를 묘사한다 해도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대중의 행동을 예측해보려는 시도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한 개인의 행동을 예측하기란 너무나 힘든, 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양 갈래 길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왼쪽 길로 가지 않는다면 분명 오른쪽 길로 들어설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선택이 두 가지로만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를 선택하고 나면 그 뒤로 아주 다양한 다른 것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끝없이 그렇게 펼쳐진다. 사실 우리의 미래는 외적 요인들,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택과는 전혀 무관한 요인들과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내적 요인들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다.

 

 

'글쟁이의 서재 > 소설가의 책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솔아, 최선의 삶  (0) 2015.12.24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0) 2015.08.23
이석원, <실내인간>  (0) 2015.08.16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0) 2015.05.2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