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醉不歸

- 허수경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크러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보았던가 아니었던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던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도저히 취하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다라는 뜻의 불취불귀..취함이 없으면 돌아가는 것도 없다는 이 말이 참 알 것 같으면서 모르겠다. 바꿔 말하면 취해야 돌아갈 수 있다, 취해야 너에게 돌아갈 수 있다, 그때의 우리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일까..

 

1연에서 화자는 어느 해의 봄날의 술자리를 회상한다.

봄그늘 아래의 술자리에 햇살이 쏟아졌었나?그때 난 와르르 무너진 채 햇살 아래 헝크러져 있었나?하며 기억을 더듬는다. 그리고 말한다.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고. 와르르 무너지고 햇살 아래 헝크러져 있었을망정 마음만은 놓아보내지 않고 잡고 있었다고. 앞에서의 확신 없는 목소리에 비해 조금은 확신이 실린 어투로 말을 한다. 하지만 기억이 없다고 해서 화자가 실제로 마음을 놓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화자의 기억이 그렇다는 것에 고개를 주억거릴뿐..아직 우리는 화자의 기억대로, 화자가 실제로 마음을 놓아보내지 않았는지 , 아니면 기억이나 마음과는 달리 마음을 놓아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어서 2연에서 화자는 '너'에 대해서 회상한다.

나의 마음과 너의 마음이 서로 마주보았는지, 그리고 둘이 나누었을 무수한 포옹이 아니라, 팔로는 안을 수 없는 서로의 것들을 안아주었는지 자문을 한다. 물리적으로 안아줄 수 없는 모든 종류의 마음의 포옹을 더 마음에 걸려하고 내가 널 마음으로 따뜻하게 안아줬었는지 염려한다. 그리고는 너는 경계없는 봄그늘이었던가라는 의문을 던지며 그 시절의 나에게 갖는 '너'의 의미에 대해 명명해보려고 한다. 너는 내게 경계없는 봄그늘이었던가.. 따뜻하고 안락해서 경계를 풀게 하는 그런 봄그늘 같은 존재였던가..하며 '너'의 존재를 규정지어 보려고 한다.

그런데 3연에서 그 때의 '너'와 마주보았던 마음이 화자가 놓아보내지 않았음에도 혼자 길을 떠났다가 길을 잃고 있다. 길을 잃었으니 가지를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길을 잃지 않고 갔었던 과거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돌아온 자신의 마음을 화자는 안쓰러워한다. 화자는 떠난 마음이 기왕이면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다. 여기서 몽생취사는 사전에 있는 취생몽사라는 말을 변형한 시인의 단어이다. 술에 취한 듯 살다가 꿈을 꾸듯이 죽는다는 의미를 지닌 취생몽사의 뜻을 통해 유추해보건대 몽생취사는 꿈을 꾸듯이 살다가 술에 취한 듯 죽는다는 뜻인 것 같다. 화자는 내 마음이 저 혼자 꿈을 꾸듯이 살다가 술에 취한 듯 죽기를 바랐다. 그런데 마음은 그 바람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마음을 길을 잃었으며, 오히려 '갔던 길'인 과거까지 헝클어뜨리며 다시 내게 돌아온 것이다.

화자는 1연에 이어서 4연에서 다시 한번 말한다.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고. 그리고 말한다. 더는 취하지 않아서 갈 수도 올 수도 없이 길에 묶여있다고. 취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는 '불취불귀'라는 제목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화자는 마음을 보내기 위해서 술을 마셨고, 취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길을 떠나기 시작했는데, 도착할만큼 취하지 않아서 마음이 길을 잃었다고. 그래서 갈 수도 올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고. 그리고 또 말한다. 내가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지만, 더이상 난 안녕하지도 않다고.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다시 한번 봄 그늘 아래서의 일들을 떠올린다. 봄그늘 아래에 얼굴을 묻고 울었던 일을. 울다가 울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던 일을. 그리고 마지막 행에서 말한다.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고. 이 시행은 정말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듯하다.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고 그 시절의 기억들, 그 시절의 너와 나에 대한 기억들이 다 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정말 마음을 놓아보내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것을 통해 그 시절의 기억들, 그 시절의 너와 나에 대한 기억들이 그만큼 강력하고 그립다는 뜻일 수도 있고..

 

여러모로 이 시에서는 3번이나 반복되면서 강조되고 있는 시행이 핵심인 것 같다.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이 없다는 말,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라는 말,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라는 말. 이를 보면 화자는 마음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으며, 보내지 않은 것 같다. 따스하고 안락한 봄그늘 아래, 기분좋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에서조차 날 와르르 무너지게 하고, 헝크러지게 하는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아픔과 그리움에도 화자는 마음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과거의 '갔던 길', 그 시절의 추억마저 헝클어뜨리고 있는데도 이 화자는 마음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취하면 돌아갈 수 있으나 그마저도 더는 취하지 못해서 가던 길에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데도 그럼에도 마음을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봄 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울게 하는 마음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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