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친 후 어느 날 -
나의 방안에 설움이 충만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고가는 것이 직선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맞닥뜨리는 것 같은 속에서
나의 설움은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찾아갔다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 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아 그러나 지금 이 방안에는
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느냐

흐르는 시간 속에 이를테면 푸른 옷이 걸리고 그 위에
반짝이는 별같이 흰 단추가 달려있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자꾸 뻐근하여만 가는 목을 돌려
시간과 함께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것
그것은 혹시 한자루의 부채
- 그러나 그것은 보일락 말락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것 -
하나의 가냘픈 물체에 도저히 고정될 수 없는
나의 눈이며 나의 정신이며

이 밤이 기다리는 고요한 사상마저
나는 초연히 이것을 시간 위에 얹고
어려운 몇고비를 넘어가는 기술을 알고 있나니
누구의 생활도 아닌 이것은 확실한 나의 생활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
빈 방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 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는가




- 김수영, 『방안에 익어가는 설움』, 1954.


​설움이 가득한 생활이어도 이건 누구의 생활도 아닌 이것은 확실한 나의 생활
설움이 방 안에 충만할 때도, 우둔한 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설움을 역류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헤맬 때도, 고요한 사상을 시간 위에 얹고 어려운 몇고비를 넘어가는 것

그렇고 설움을 보낸 뒤 빈 방에 홀로이 머물러앉아 책을 열어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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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내 동생의 결혼식(앞줄은 어머니, 뒷줄은 김수영, 김현경 부부)


1968년 '시여 침을 뱉어라' 부산에서의 문학세미나


<달나라의 장난>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 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년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1953>

​1950년 8월 의용군으로 끌려간 지 2년 만에 포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김수영 시인은 얼마 되지 않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런 그에게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씨는 어느날 편지를 쓰면서 한 장의 만화를 그려넣었다. 그 그림은 접시 위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앙꼬빵 세 개였다. 포로수용소에서 갓 나오자마자 부산에서 직장을 얻기 위해 거리에서 거리로 굶주리며 떨고 있을 수영에게 따스한 유머로 위로하기 위해서 그려넣은 것이었는데 수영은 그림을 보고 웃다가 울었다는 글과 함께 이 시 <달나라의 장난>을 보내왔다고 한다.


산다는 것이 새삼스레 위대하고 신기로워 보일 때가 있다.
​​​​​그러면 자연스레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라는 구절처럼 우리는 무엇을 위해 멈추지 않고 돌고 또 도는걸까?하는 의문이 든다.

생존을 위한 모든 행위의 귀찮음, 고통과 번뇌를 참아내면서까지 왜 우린 매일 살아가고 있는걸까? 밥을 먹고 싶지 않아도 죽으면 안되니까 먹어줘야 하고, 잠만 자고 싶어도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 잠을 참아가며 일을 해야 하고, 즐겁기 위해 즐겁지 않은 일을 배로 참아내야 하는 고통 넘어 고통인 삶을 대체 왜..? 죽음이 평화 속에 영원히 잠드는 거라면 우리는 왜 평화 대신 전쟁같은 삶을 택하는걸까? 죽으면 귀찮은 밥먹기도 안해도 되고 실컷 잠만 잘 수 있을텐데. 죽으면 아무것도 아닌게 되는게 두려워 내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고 증명하기 위해 살아가는걸까?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 않으려고 이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참아내며 꿋꿋이 살아가는걸까?

달나라의 장난도, 달도 없는 그 세계가 무서워서? 사는 동안은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나가야하며 끊임없이 돌아야만 하는 팽이같은 삶이 너무나 무겁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날 보면 모든 생명은 예외 없이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 한 계속 살아가도록 애초부터 설계되어 있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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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조금 덜 말하고 조금 더 듣는다면 우리들 서로가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느껴지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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